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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한국 연극의 대부' 극단 산울림 대표 임영웅 연출가 별세
    • 작성일2024/06/11 13:25
    • 조회 44

    반세기 '고도를 기다리며' 연출… 1500여 회 공연, 22만 관객이 본 '전설'로

    산울림소극장 무대 위에 선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는 “여기가 바로 내 집”이라고 말했다. 2016년 12월 26일 모습. /오종찬 기자

    산울림소극장 무대 위에 선 임영웅 극단 산울림 대표는 “여기가 바로 내 집”이라고 말했다. 2016년 12월 26일 모습. /오종찬 기자

    극단 산울림 대표이며 ‘한국 연극의 대부’인 연극 연출가 임영웅(88) 선생이 4일 새벽 3시23분 소천했다고 유족이 밝혔다.

    임영웅 선생은 유치진(1905~1974), 이해랑(1916~1989), 차범석(1924~2006)으로 이어지는 한국 사실주의 연극 계보의 적장자(嫡長子)였다. 하지만 정작 생전의 그는 “‘~주의’같은 말은 평론가들이 필요에 따라 붙이는 것일 뿐”이라며 “연극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야기이고,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휘문중 1학년 때인 1948년 ‘얄개전’의 작가인 조흔파 교사가 연극 ‘마의태자’에 단역으로 출연시키면서 고인의 인생은 오직 연극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서라벌예대에 진학했고, 스물한 살 때인 1955년 ‘사육신’이 첫 연출작이었다. 조선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한국방송 등에서 방송 PD로 일하기도 했지만 금세 다시 연극으로 돌아왔다.

    2005년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당시 연출가 임영웅과 에스트라공 역의 박용수, 블라디미르 역의 한명구(왼쪽부터). /조선일보DB

    2005년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당시 연출가 임영웅과 에스트라공 역의 박용수, 블라디미르 역의 한명구(왼쪽부터). /조선일보DB

    1966년 한국 뮤지컬 제1호로 역사에 남은 ‘살짜기 옵서예’를 연출한 뒤 전업 연출가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국립극단의 ‘환절기’(오태석 작)에 이어 신문기자 시절 일본어 번역 희곡으로 읽은 뒤 가슴에 묻어뒀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1969년 초연 무대에 올렸다. 공연 개막 전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연극은 개막 1주일 전 전석 매진됐다. 300석 소극장에 매회 입석까지 400~500명의 관객이 빽빽이 들어찼다. 이후 반세기 동안 1500여 회 공연하며 22만 관객이 본 임영웅의 산울림표 ‘고도’는 우리 연극의 전설이 됐다.

    초연 성공이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의 밑거름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 배우인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에, 김용림·사미자·윤소정·윤여정·손숙 등이 창단 단원이었다. 그해 10월 극단 창단 공연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극단 산울림에서 고인은 연극 60여 편을 연출했다. 아서 밀러의 ‘비쉬에서 일어난 일’, 최인호의 ‘가위 바위 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강백의 ‘쥬라기의 사람들’ 등 번역극부터 창작극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극단 산울림은 1992년 제2회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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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산울림소극장에서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를 연습 중인 배우 손숙(왼쪽)과 작품을 지도 중인 연출가 임영웅. /조선일보DB

    1985년 사재를 털어 소극장 산울림을 개관했다. 극장 건물 3층이 그와 가족의 살림집이었다. 실질적 후원자였던 아내(오증자 서울여대 불문과 명예교수) 덕이 컸고, 문화계 후원회도 결성돼 극장 개관을 도왔다. 생전의 그는 “연극 시작하고 제일 잘 한 일이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 극단이 전용 소극장을 갖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다. 이 극장은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담배 피우는 여자’, ‘숲속의 방’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여성 연극 바람의 중심이 됐다. 극장은 딸인 임수진 극장장이 이어 받아 운영하고 있다.

    ‘고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초청받으며 국가 대표 연극 대접을 받게 됐고, ‘부조리극(Theater of Absurd)’이란 말을 처음 쓴 영국 비평가 마틴 에슬린이 직접 관람한 뒤 호평하면서 해외 공연 길도 열렸다. 1989년 한국 연극 최초로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여한 데 이어 1990년엔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 페스티벌에 초청됐다. 현지 언론은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는 헤드라인으로 상찬했다. 이후에도 임영웅의 산울림표 ‘고도’는 폴란드,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해외 공연을 이어갔다. 2019년엔 국립극단 기획으로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50주년 기념 ‘고도’ 공연이 열렸다.

    임영웅이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 앉아 있다. 올해는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50주년. 알츠하이머를 앓는 그는

    2019년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 앉아 있는 임영웅 연출.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50주년, 알츠하이머를 앓는 그는 "전엔 인물들에게서 코미디를 끌어내려 했는데 요즘엔 연민을 더 느낀다"며 "50년 넘게 고도를 기다린 광대들이 내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종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1966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해, ‘꽃님이! 꽃님이!’, ‘지붕위의 바이올린’, ‘키스 미 케이트’, ‘갬블러’ 등 다양한 뮤지컬도 연출했다. 특히 ‘갬블러’는 2002년 일본에서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우리나라 해외 공연 사상 최대 성공을 거둔 뮤지컬로 꼽힌다.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 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2016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고, 2019년 제23회 만해대상 문예부문 대상을 받았다. 연극연출가협회장, 연극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유족은 부인 불문학 번역가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와 아들 수현, 딸 수진씨.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7일 오전 8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02)2072-2010

     

    산울림소극장의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앉은 연극 연출가 임영웅 선생. 2007년 9월 모습. /전기병 기자

    산울림소극장의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앉은 연극 연출가 임영웅 선생. 2007년 9월 모습. /전기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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